중국의 유명한 소설 세 가지가 있다. 서유기 , 금병매 , 삼국지 이다

이 중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삼국지이다. 을 중시하는 민족인 한국인에게 삼국지보다 흥미로운 중국 소설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어릴 때부터 삼국지를 많이 접해왔다. 만화책 , 게임 , 소설 등 삼국지는 항생 내 주변에 있었다. 유비가 소설의 주인공이기에 처음 삼국지를 소설로 봤을 때 유비 중심으로 삼국지를 감상했었다. 더군다나 유비는 황실의 후손이기에 유비가 삼국을 통일하길 바라는 생각으로 삼국지를 읽었었다. 그리고 그의 신하인 제갈량의 충절과 지략에 감탄하였었다

그러나 중국 역사를 공부해보고 삼국지를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은 변해갔다

내가 읽은 삼국지 연의의 작가 나관중이 왜 삼국지를 집필하였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니 삼국지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나관중은 삼국지 연의를 통해 한족의 자부심을 다시금 갖게 하고 싶어했다. 그런 생각으로 책을 썼기에 한 황실의 후손인 유비와 그의 신하들은 충의를 다하는 멋진 신하들로 묘사되어있으며 그 외의 국가의 왕과 신하들은 조금 격하되어 묘사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조조나 손권도 한족이지만 유비의 상징성이 크기 때문에 유비를 부각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한족외의 이민족에 대한 비하가 소설 곳곳에서 드러난다. 가장 큰 예를 들자면 맹획같은 인물에 대한 묘사이다. 맹획에 대해 예의를 모르고 충절 없는 인물로 묘사해놓았다.


-Gamebred의 생각.



더핸드앤몰트탭룸은 경복궁역 7번출구에서 5분거리에 위치하고있다. 골목에 있어서 약간 찾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으나, 골목구경이다 생각하고 몇번 헤매고있으면 찾을수있다.

여러 방송에도 소개된 더핸드앤몰트. 더핸드앤몰트에서 직접 운영하는 매장이다. 더핸드앤몰트 대표 도정한씨를 예전에 마리텔에서 본적이있었는데

그때 방송 보면서 ' 꼭 한번 맛보고싶다'라고 생각했었다.

이제서야 맛을 보았다!!

왼쪽이 벨지안 위트(상큼한 과일향의 밀맥주), 오른쪽은 헤페 바이젠( 바나나향과 달콤함을 느낄수있는 독이 밀맥주) 입니다.


벽면을 우리나라 전통 '자개장'느낌으로 살짝 꾸며놓았다.

안주. '칠리프라이' , 평소 간이 쎈 음식을 싫어하는편인데 이 칠리프라이는 겉보기에는 자극적으로 보이지만

먹어보면 상당히 재료맛은 살아있되, 간은 상당히 순하게 되어있다. 매우 맛있다 .

감자도 부드럽고 따뜻했다.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공간이라 천장에 서까래가 보인다.






연남동에는 예쁘고 멋있는 카페, 레스토랑이 많다. 하이웨이스트는 워낙에 유명한 카페라 굳이 설명을 많이 안해도 될것같다. 

인스타그램들어가서 #검색해봐도 엄청나게 많은 사진들이 있다. 

연남동은 상권이 점점 커져서 주택가쪽도 상업적인 가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고있다. 

하이웨이스트가 있는쪽 연남동은 사실 처음 와본 곳이다. 이 근처에 인스타그램으로 제2의 전성기를 구가중인 개그맨

'김재우'의 장난감 가게도 있으니 팬분들은 들려보시면 좋겠다. 덤으로 가끔 미키광수도 볼수있다...




내가 갔던 날도 사람이 많아서 커피머신 앞에 착석했다.

나는 카페라테를 마셨다. 맛있다.

이곳이 하이웨이스트 정문. 손님분들 대문에서부터 사진을 엄청 찍으시던..

하이웨이스트는 주택을 개조해서 만들었다.

사진입니다.

저 왼쪽에 돌에 메뉴가 써있다. 팁을 넣는 통도있고, 그릇들이 예쁘다.

사진입니다.

마지막으로 거울!



아, 이 근처에 일본식 술집 요코쵸도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포스팅했었죠. ! 카페 하이웨이스트 들렸다가 요코쵸가면 좋은 데이트 코스가 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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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콜라의 역사

 

1886년 뉴욕 시의 항구.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이 그 자태를 갖추고 있을 즈음 그 곳으로부터 800 마일 정도 떨어진 다른 지점에서는 또 하나의 미국의 상징이 세상에 막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습니다. 역사의 흐름을 바꾼 여러 위인들처럼 남북전쟁 참전용사이자 아틀랜타의 약사였던 존 펨버턴 역시 단순한 호기심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펨버턴은 여러 가지 약제들을 조합하는 것을 무척이나 즐기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오후 두통을 경감시킬 응급제를 찾던 중 그의 냄비 안에서 캐러멜 색의 향기로운 액체를 섞어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액체가 완성되자 이웃의 자콥 약국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혼합액에 탄산수를 더한 후 약국의 손님들에게 시범으로 맛을 보게 했습니다. 손님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이 새로운 음료는 뭔가 특별하다는 평을 내렸습니다. 따라서 자콥 약국에서는 이 음료수를 한 잔에 5센트로 시판하기 시작했습니다. 펨버턴의 회계 담당자였던 프랭크 로빈슨은 이 혼합물에 코카-콜라라는 이름을 붙여 그의 독특한 필체로 적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코카-콜라는 그가 썼던 그대로 전세계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코카-콜라가 대중에게 선을 보인 첫해 코카-콜라는 약 하루 9잔 정도로 판매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백 년 후 코카-콜라는 일년에 거의 400 리터의 원액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펨버턴은 발명가이지 사업가는 아니었습니다. 또 그가 발명한 것이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 받는 제품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1888년에서 1891년 사이에 펨버턴은 자신의 사업을 모두 합쳐 약 $2300에 아사 캔들러라는 아틀랜타 사업가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캔들러는 코카-콜라 첫번째 사장이자 코카-콜라와 브랜드에 실제적인 비전을 부여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천부적인 사업가였던 아사 캔들러는 코카-콜라를 단순한 발명품에서 하나의 사업으로 변신시켰습니다. 그는 시장에 갈증을 느끼는 소비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캔들러는 그러한 소비자들에게 이 새롭고 흥미로운 음료를 소개하는 재기에 넘치며 혁신적인 방법을 고안해 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코카-콜라를 한번 시음해볼 수 있는 쿠폰을 나누어 주었고, 코카-콜라를 배급하는 약국에는 코카-콜라 상표가 달린 시계, 단지, 달력 등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어디에서나 코카-콜라를 보게 되었고 이러한 적극적인 홍보는 그에 따른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1895년 캔들러는 코카-콜라 원액 제조 공장을 시카고와 달라스, 로스엔젤레스에 세웠습니다. 코카-콜라가 이와 같은 인기를 얻게 됨에 따라 자연적으로 이 음료를 보다 새로운 방식으로 즐기고자 하는 수요가 형성되게 되었습니다.

 

1894년 조셉 비덴한이라는 사업가는 최초로 코카-콜라를 병에 담아 시판했습니다. 그는12개의 병에 코카-콜라를 담아 캔들러에게 보냈으나 그로부터 이렇다 할 반응을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비록 캔들러가 명석하고 혁신적인 사업가였지만 그는 코카-콜라 성공의 핵심은 고객들이 어디든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병에 담긴 음료라는 점에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5년 후인 1899년 두 명의 채터누가시의 변호사인 벤자민 에프 토마스와 조셉 비 와이트헤드가 총 1 달러에 코카-콜라를 병에 담아 판매할 독점권을 취득할 때까지 그 핵심을 여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브랜드에 대한 모조품이 떠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브랜드의 성공에 대한 증거로 기분 좋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코카-콜라는 코카-콜라의 성공을 이용하려는 가짜 음료들의 성행을 그저 반길 수만은 없었습니다.

코카-콜라는 훌륭한 제품이자 훌륭한 브랜드이며 이 두 가지 모두 보호되어야만 했습니다. 이 시기의 코카-콜라 광고는 진짜 코카-콜라라는 면모에 초점을 맞추어 소비자들에게 진짜를 드십시오”, “모조품을 거부하십시오라는 메시지를 촉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코카-콜라는 코카-콜라만의 독특한 병 모양을 고안하여 사람들이 진짜 코카-콜라를 식별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1916년 인디아나주의 테러호트시의 루트 글래스 사에서 그 유명한 코카-콜라 병을 생산해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까지 코카-콜라를 특징짓는 이 병은 사람들의 눈을 끄는 모양과 독창적인 모양과 어둠 속에서도 진품을 가려낼 수 있도록 고안되었습니다.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면서 코카-콜라는 날로 성장하여 쿠바, 푸에르토리코, 프랑스 및 다른 국가 들과 여타 미국령으로 전파되었습니다. 1900년에 코카-콜라 제조업체는 겨우 두 군데에 불과했습니다. 1920년에 이르자 약 1,000개 이상의 음료 제조업체에서 코카-콜라를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코카-콜라의 역사에서 우드러프만큼 커다란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드러프는 1923년 그의 아버지 어네스트가 코카-콜라를 아사 캔들러로부터 매입한지 5년 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코카-콜라 사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캔들러가 미국에 코카-콜라를 선보였다면 우드러프는 코카-콜라의 대표로서 거의 60년 이상을 전세계에 코카-콜라를 알리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우드러프는 어디서나 사업 확장의 기회를 발견했던 마케팅의 천재였습니다. 그는 혁신적인 광고와 홍보활동을 통해 전세계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코카-콜라는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미국 대표 선수단과 함께 했고, 코카-콜라 로고는 캐나다의 개 썰매 경기와 스페인의 투우장의 벽을 장식했습니다.

 

우드러프는 코카-콜라의 6개들이 상자와 개방형 냉각기 등 여러 혁신적인 발명품들을 개발하여 유통시킴으로써 사람들이 코카-콜라를 보다 쉽게 즐길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주부들이 집에서 쉽게 마개를 딸 수 있는 코카-콜라 6개들이 한 상자를 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여성들을 파견하여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코카-콜라 브랜드가 찍힌 병따개를 배포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상자 속에서 벗어나기식의 사고 방식은 바로 그 시대에 코카-콜라를 이끈 우드러프의 리더쉽이 반영된 것으로 코카-콜라가 단순한 엄청난 성공작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삶의 일부로 자리잡도록 만든 요인이었습니다.

 

1941년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드러프는 회사에 얼마나 부담이 되건 간에, 어디서든 코카-콜라 한 병을 5 센트에 마실 수 있다.”는 비전을 세웠습니다. 1943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은 코카-콜라에 긴급 전보를 보내 해외에 10개의 코카-콜라 현지 생산공장을 짓도록 요청했습니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많은 유럽인들이 코카-콜라를 처음 접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전쟁이 종결되자 코카-콜라의 판매망은 유럽 각지로 확대되게 되었습니다.

40년대 중반에서 1960년까지 코카-콜라 제조업체의 수는 거의 두 배로 증가했습니다. 종전 후 미국은 낙관주의와 경제적 번영에서 오는 활기로 충만했습니다.

 

코카-콜라는 즐겁고 유쾌한 생활 양식의 일부가 되었으며 코카-콜라의 광고에 사용되었던 이미지는 그 시대의 정신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코카-콜라 브랜드의 75년 간의 경이적인 성공 이후, 코카-콜라는 스프라이트(1961), 터부(1963), 프레스카(1966)와 같은 새로운 브랜드를 출시하였습니다.

코카-콜라는 매년 전세계적으로 빠른 성장을 보였으며 캄보디아, 몬트리얼, 파라과이, 마카오, 터키 외에 다수의 국가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코카-콜라 사업에서 항상 중요한 부분이었던 코카-콜라 광고는 70년대에 이르자 코카-콜라라는 브랜드를 전적으로 즐거움 그리고 자유와 연계하는 명실상부한 국제 코카-콜라 사업의 일환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코카-콜라의 국제적인 성격은 1971년 광고를 통해 엿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이탈리아의 언덕 꼭대기에 한데 어울려 전 세계에 콜라로 한턱 내련다.”는 노래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1978년 코카-콜라는 포장 청량 음료를 중국에 시판하도록 허가 받은 유일한 회사가 되었습니다.

 

종아리 워머와 머리띠, 헬스 열풍의 시대였던 80년대는 코카-콜라에 있어서도 변화와 혁신의 시대였습니다. 1981년 로버트 고이주에타 회장이 이사회 의장겸 코카-콜라 경영 최고 책임자를 역임하게 되었습니다.

1961년 카스트로 치하의 쿠바에서 미국으로 이민했던 고이주에타 회장은 그가 지적 모험이라 부른 새로운 전략을 통해 코카-콜라를 전면 재조정했습니다. 그의 과감한 개혁 중 하나는 수많은 미국 코카-콜라 제조 사업을 코카-콜라 주식회사라는 하나의 주식 회사로 전환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다이어트 코-크를 출시하여 코카-콜라 상표 내에서 최초로 브랜드를 확장했습니다.

다이어트 코-크는 2년 만에 전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저칼로리 음료로 성장하여 코카-콜라에 버금가는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1985년 고이주에타 회장이 착수한 또 하나의 과제는 바로 코카-콜라의 맛을 혁신하는 것이었습니다. 99년 동안 이어온 코카-콜라 제조법에 대한 최초의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눈을 가리고 시행한 시음 테스트에서 사람들은 이 새로운 맛을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세상에서 사람들은 코카-콜라의 원래의 맛에 대해 감정으로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코카-콜라의 맛을 되돌려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게 되었습니다. 비평가들은 이 사건을 최고의 마케팅 실수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이주에타 회장은 성공한 투자가인 워렌 버펫씨가 일찍이 평했듯이 레몬을 레모네이드로 바꿀 줄 아는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코카-콜라는 코카-콜라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원래의 맛의 코카-콜라를 복귀시켰습니다. 그리고 코카-콜라 클래식의 판매는 경쟁 제품을 제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시장에서 선두를 점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는 코카-콜라가 성장을 거듭한 시기였습니다. 이 동안 올림픽, FIFA 월드컵 축구, 럭비 월드컵, NBA 농구 등의 지속적인 지원을 통해 스포츠와의 오랜 제휴 관계가 한층 더 강화되었습니다. 코카-콜라는 NASCAR(미국 튜닝카 레이스)의 공식 음료로 지정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하는 스포츠 하나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1993년에는 널리 호평을 얻은 언제나 코카-콜라(Always Coca-Cola)” 광고 캠페인이 도입되면서 사랑스런 코카-콜라 북극곰이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되었습니다. 1990년에는 동독에서 코카-콜라 제품이 판매되고 1993년에는 또다시 인도에서 새로운 시장이 열렸습니다.

 

파워에이드 스포츠 드링크, 쿠우 어린이 과일 음료, 다사니 생수 등을 비롯한 새로운 음료 브랜드가 출시했습니다. 인도의 림카(Limca), 마자(Maaza), 떰즈 업(Thums Up), 미국의 바크스(Barq’s) 루트 비어(무알콜 맥주맛 음료), 페루의 잉까 콜라(Inca Kola), 영국의 캐드베리 스윕스(Cadbury Schweppes’) 음료 브랜드 등, 전세계 120개국 이상에 걸친 기업 인수를 통해 브랜드의 종류가 더욱 늘어났습니다. 1997년에는 이미 매일 10억 개의 제품을 판매하기에 이르렀지만, 성장을 위한 기회는 아직도 무궁무진합니다.

 

1886년에 코카-콜라는 애틀랜타에 있는 작은 약국의 단골손님들에게 청량제를 선보였습니다. 100년을 훌쩍 넘긴 지금 코카-콜라의 목표는 사람들이 400개가 넘는 브랜드 중 하나하나를 마실 때마다 마법 같은 느낌을 선사하는 것입니다. 보스턴에서 부다페스트, 바레인에 이르기까지 코카-콜라의 애호가들은 암바사, 베지타베타, 프레스콜리타 같은 코카-콜라의 여러 브랜드를 즐기고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된 곳이라 할지라도 코카-콜라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코카-콜라는 다양한 문화와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음료를 좋아하고 언제 어디서 마시고 싶어 하는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지역 시장에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코카-콜라는 인연이 닿는 모든 분들에게 상쾌함과 혜택을 제공하기 위하여 현지의 보틀링 파트너들과 더불어 지역 공동체에 도움의 손길을 뻗치고 있습니다.

 

코카-콜라는 하루에 겨우 아홉 병씩 생산되던 초창기를 거쳐, 하루에 14억 개가 넘는 음료를 판매하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브랜드로 성장했습니다. 사람들이 코카-콜라의 어떤 브랜드를 고르든, 매 순간의 이러한 선택이 보다 더 흥미진진하고 만족스러운 것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출처 : http://company.cocacola.co.kr/AboutCocacola/history_01.html

<적정기술>

기술에 소외된 국가, 계층의 사람들을 위해 개발된 기술로, 단순한 기술의 보급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기술이 지속가능하게 활용되어 기술 사용자의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적정기술의 조건: 자본이 저렴해야한다, 현지에서 나는 재료 이용, 현지 기술과 노동력을 활용하여 일자리 창출, 소규모 그룹이 사용가능하도록 충분히 소규모여야함, 특정분야의 과학지식없이도 사용할 수 있고 유지관리할수있어야함,지역주민스스로 만들수있어야한다, 사람들의 협동 작업을 유도하고 지역사회발전에 기여, 분산형 재상 가능한 에너지원을 사용,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기술을 이해할수있어야함, 변화하는 환경에 맞게 사용되고 적응될 수 있도록 유연해야한다,

 

<적정기술과창업>

소외된 90%를 위한 기술을 목표로하는 적정기술을 통해 파괴적 혁신 달성. 피라미드 저변이론 bop bottom of the prymid을 통해 기존에 외면 받아온 계층을 위한 기술과 제품을 통해 새로운 시장 창출이 가능하고 이 기술과 제품을 활용해 기존 시장 또는 선진 시장까지 진출할 수 있다.

 

<린스타트업의 개념과 필요성>

린스타트업은 극심한 불확실성 속에서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군살을 빼 ᄈᆞ르게 움직이는 초기 단계의 조직이나 기업이다.

질 높은 실수 시행착오를 통해 배워 이런 실패를 축소하고 성공확률을 높임.

 

<린스타트업의 실행 원칙과 적용방법>

린스타트업은 배움의 과정임. 집중,속도,균형감각이 중요하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고build 측정하고measure 배우는learn 피드백 순환을 빨리 돌리는게 좋다. 그 순환 사이클을 빨리 돌릴수록 배움도 가속화되고 혹 잘못을 발견했을 때 신곡하게 점검해서 제품이나 서비스에 반영할 수 있게 된다.

 

<린스타트업을 하기 위한 전제조건 중 비젼>

비전은 사업목적why에 해당됨. 사업 목적은 불변적인 요소이며 팀원들이 사업을 해 나가는데 있어 중심 역할. 매우중요. 왜 창업을 하는가 비젼을 정립하고

그것을 해나가는 방법how 그 방법론에 따라 시장에 원하는 제품what을 빨리 출시하고 그것을 통해 시장반응을 읽고 최적화 시켜가다 보면 성공 확률도 높아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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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사업화의 개념>

기술을 이용하여 제품을 개발생산 및 판매하거나 그 과정의 관련 기술을 향상시키는 것.

기술 개발의 결과물인 기술 자산을 활용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활동을 포괄적으로 의미.

기술 사업화는 사업화 대상 기술의 원천에 따라 공공 기술의 사업화와 민간 기술의 사업화로 나뉘며, 개발된 기술이 다양한 형태의 상업적 목적으로 활용되어 경제적 이득을 창출하는 단계에 도달하는 것을 사업화의 성과로 본다.

착상 보육 시연 촉진 지속 의 5단계로 구분됨.

 

원천기술을 개발해 시제품 개발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부족한 재원으로 사업자가 겪게 되는 어려움인 악마의 강

실험실 다누이에서 개발된 기술이 제품화 되는 과정에서 추가 개발 자금 및 상용화 기술이 부족해 겪는 어려움을 죽음의 계곡

제품 양산화 체제를 갖춘 후 시장 확대와 시장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마케팅,유통망구축 등 비기술적 활동이 필요한 다윈의 바다는 사업자가 기술 사업화에 성공해 최종적으로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단계별로 외부로부터 투자를 포함해 다양한 자원의 공급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착상단계 자원의 유형(씨앗자금) 주요자원제공자(기술보유자,창업자,기업rd,정부공공재단 지원rd프로그램)

보육단계 자원의유형(창업자금) 주요자원제공자(기보자,창업자,기업rd,정부지원프로그램,엔젤투자자,벤처케피탈,지방정부)

시연단계 자원의유형(시장개척자금) 주요자원제공자(기업rd또는투자,엔젤투자가,벤쳐케피털)

촉진단계 자원의유형(초기확장자금) 주요자원제공자(기업rd또는투자,벤처케피털,엔젤투자가)

지속단계 자원의유형(전통적기업자금) 주요자원제공자(기업투자,벤처케피털,상업대부기관)

 

<기술사업화의8가지유형>

기술지도: 기술 보유자가 기술 도입자에게 기술의 적용을 위한 교육/훈련을 제공함, 양도 혹은 실시권 허락과 병행해 이루어짐.

기술양도: 기술보유자가 기술도입자에게 기술 소유권을 이전함

공동연구: 기술보유자가 기술 도입자게에게로의 기술 이전을 목적으로 공동 연구 수행

실시권허락(라이센싱):기술 보유자가 기술 도입자에게 기술의 실시권(라이센싱)을 허락

합작사업(조인트벤쳐): 기술보유자와 기술도입자가 합작하여 제3의 기업을 설립하고 사업화 추진. 기술 보유자가 공공 연구기관인 경우는 주로 보유 기술을 현물 출자하여 참여함.

기술 지주회사: 기술 보우자가 기술 지주회사를 설립하고 기술 사업화를 목적으로하는 자회사를 운영함

인수합병(m&a): 기술도입자가 사업화 추진을 위해 필요한 기술과 경영 인프라를 보유한 기술보유자를 인수합병함

기술창업(스핀오프등): 기술 보유자의 연구자 등 소속 직원이 직무 발명 등을 인정받아 창업하거나 창업에 참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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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기업의 개념>

사회적 목적을 우선으로 추구하면서 동시에 재화 및 서비스의 생산과 판매 등 수익 창출을 위한 영업 활동을 수행하는 영리 목적 기업과 비영리단체의 중간 형태를 가지는 기업이다.

사회적 기업의 중요한 특징중 하나는 영리 목적 기업과 비영리단체의 중간 형태를 가지는 기업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기업은 사회적 가치 실현이라는 우선적 목표를 가지고 경제적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으로 사회적 기여의 사명을 추구하는 비영리단체의 특성과 경제적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영리 목적 기업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기업이다.

 

사회적 기업은 사업 모델을 가지고 지속적인 영리 활동을 통해 수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비영리단체와 다르다.

 

<한국의 사회적 기업>

한국에서는 2007년 제정된 사회적기업육성법에 따르면 사회적 기업이란 취약 계층에게 사회 서비스 또는 일자리를 제공하거나 지역 사회에 공헌함으로써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등의 사회적 목적을 추구하면서 재화 및 서비스의 생산 판매 등 영업 활동을 하는 기업으로서 고용노동부장관의 인증을 받은 기업을 일컫는다.

장점: 초기에 빠르게 사회적 기업이 성장할 수 있다. 정부의 갖가지 혜택

단점: 법의 지정을 받지 않으면 사회적 기업 타이틀을 쓰지 못함. 법의 테두리내에서만 활동.

 

<사회적 기업 유형>

일자리 제공형 : (주요활동목표) 취약 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을 조직의 주된 목적으로 함

사회 서비스 제공형: (주요활동목표) 취약 계층에게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조직의 주된 목적으로 함

지역사회 공헌형: (주요활동목표) 지역 사회에 공헌하는 것을 조직의 주된 목적으로 함

혼합형: (주요활동목표) 취약 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목표와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는 목표를 혼합하여 추구함

기타형: (주요활동목표) 상기된 유형으로 정형화할 수 없는 다양한 형태로 사회적 목적 달성을 추구함.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받기 위해서는>

1인 이상의 유급 근로자를 고용하여 영업 활동을 수행해야 함

영업 활동을 통한 총 수입이 총 노무비의 30%이상이어야 함

사회적 목적 중 하나를 달성하야하며,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를 갖추어야 함

영업 활동을 통한 이윤이 발생할 경우 이윤의 3분의 2이상을 사회적 목적을 위해 재투자 해야함


 

<국가별 사회적 기업의 출현 배경 및 특징>

체계적 사회보장제도의 역사를 바탕으로 복지 국가를 지향하던 유럽. 사회보장제도를 지탱해온 정부 재정 부담을 감당할 수 없는 위기에 봉착, 사회적 문제와 재정적 부담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사회적 기업에 관심. 협동조합 운동의 역사를 계승.

반면 협동조합 운동보다는 시민 사회의 기부와 자원봉사 문화가 발달한 미국. 비영리단체들이 생존을 위해 상업적 활동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발전.

제도적 지원이 미비한 가운데 비영리단체들 스스로 생존을 위한 영리 활동을 추구하게 됨으로써 발전.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업성이 높다는 특징.

한국은 imf외환 금융 위기 이후에 사회적 기업에 대한 관심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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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의 몰락 원인 (2)


3) 소니가 애플의 아이팟에게 철저하게 패배한 이유.

소니는 아이팟이 나오기 2년 전인 1999, 미국 정보기술 종합전시회 컴덱스에서 새로운 디지털 음악 플레이어를 선보일 정도로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게다가 소니 뮤직이라는 음악 콘텐츠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발표된 음악 플레이어를 두고 소니 내 외부의 평가는 좋지 않았다. ‘메모리스틱 워크맨‘VAIO 뮤직클럽두 가지였는데 각각 오디오 사업부와 VAIO 사업부에서 따로 만든 제품이었다. 제작할 때 사전 정보교환이나 협조는 없었다. 그러다보니 아이팟보다 열등한 제품을 2개 만들었을 뿐인 결과가 나왔다. 이를 두고 만일 두 사업 부문의 기술을 종합한 신제품을 만들 수 있었다면, 더 뛰어난 제품을 개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독립채산제의 결정적인 결함이 드러난 사례이다.

 

설명:<소니는 1994독립채산제를 도입했다. 독립채산제란 각 사업부가 독립회사처럼 운영되는 것으로 사업부 간 경쟁 의식을 높이고 유연성도 강화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이 제도는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사업부들은 각자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기술 공유를 꺼렸다. 자신들이 연구 개발비를 투입한 기술에 대해서는 다른 부서가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독립채산제 때문에 소니는 애플이 되지 못했다고 잡스는 말했다. 사업 부문 간 제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이를 통합 운영하는 컨트롤 타워도 없었다.>

MP3시장이 대세가 된 2004, 소니는 아이팟 대응 상품으로 네트워크맨을 내놓았다. 하지만 강점으로 여겼던 소니 뮤직이 발목을 잡았다. 소니 뮤직의 존재로 불법 복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소니는 MP3가 아닌 ATRAC이라는 독자적인 포맷의 음원을 도입했다.

이는 사용자들에게 큰 불편을 줬다. ATRAC으로 작성된 음악 파일만 재생이 가능해, 이용자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MP3 포맷의 음원은 들을 수 없었다. 게다가 VAIO 사업부에서 비슷한 기기인 ‘VAIO 포켓을 발매해 소비자들에게 혼란을 주기도 했다. 소니가 트렌드를 쫓지 못하고 실패한 대표적 사례이다.

 

설명:<소니는 자신들의 가진 CD ,레코드와 미디어 자원과 그를 사용할 수 있는 기기들의

수요가 줄어들 것을 걱정하여 음악 공유 시스템 구축을 꺼렸다. 자사 제품 간 시장이 겹쳐 서로를 잠식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새로운 트렌드를 쫓아가지 못했다. 이는 결국 애플이

아이튠즈를 만들고 음악산업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루는 동안 소니가 몰락하게 된

주요 원인중 하나이다. 소니는 기술 공유로 시장을 늘려가기보다는 자사기술을 표준화하는 전략에 매달리며 폐쇄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른바 기술의 갈라파고스 늪에 빠진 것이다. , 고립된 채 내부적으로만 진화하다가 다른 환경과의 융합 기회를 놓쳐 도태되고 말았다는 설명이다소니가 VCR 시장에서 자사의 기술방식인 베타 방식을 고수하며 시장 독점을 노리다가 보다 유연한 모습을 보인 경쟁업체 마쓰시다의 VHS 방식에 백기를 든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소니는 2002VCR 사업을 포기했다.

이와 같은 일은 모바일 시장에서도 반복됐다. 보다 대중적이고 저렴한 제품에 주력했던 애플과 삼성과는 달리 자사의 보다 완벽하고 고급 기술을 고집하며 진입 시기를 늦추다가 소비자 트렌드와의 접목점을 놓치고 말았다>

소니의 온라인 음악 다운로드 시스템 또한 문제였다. 2001년 유니버셜 뮤직과 합작투자 해 만든 프레스플레이는 사용하기가 복잡하고 어려웠다. 쉽고 편한 다운로드를 강점으로 내세운 애플의 아이튠즈와는 대조적이었다. 또 다운로드 횟수에 제한이 있어 소비자들은 프레스플레이를 외면했다. 여기에 경쟁 음악사의 비협조까지 더해져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이렇게 소니의 MP3 플레이어는 결국 실패했다. 애플이 아이팟으로 일본 시장에 진출했을 때 슬로건이었던 “Goodbye MD"는 현실이 됐다. 여기서 MD는 소니가 CD에 이어 내세웠던 차세대 매체를 말한다. 현재 일본 시장에서 아이팟 점유율은 50%. 소니의 몇 년간 계속된 반격도 아이팟의 아성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4) 전문 경영인 체제 고집의 문제점

전문 경영인 체제 고집이 조직의 관료화 불러왔다는 지적도 있다전문 경영 훈련을 받은 CEO들은 과감한 모험정신으로 투자를 늘리기보다는 최근 단기 실적을 대외적으로 보이는 데 급급해 장기적인 비전을 세우고 투자를 늘리는 데는 등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CEO들은 비용감축과 구조조정 등에 집중하며 갈 길 바쁜 소니의 행보를 늦추고 있다. 기업 혁신의 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관료화, 고립화, 안일주의가 이미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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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의 몰락원인

1) 핵심 전자부문에서의 자만, 과도한 컨텐츠 투자

소니가 현재처럼 이런저런 미디어의 제작투자에 관련되어 있는 것은 1987년 한창 전성기때 소니의 CEO였던 오가 노리오 "이젠 기술력은 다 고만고만하고 앞으로는 기계 안에 들어갈 콘텐츠로 승부해야한다"고 생각하여 실제 제품의 기획·생산·마케팅 보다는 콘텐츠 미디어 분야에 대한 투자를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1988CBS 레코드를 인수하여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 만들고 1989년에는 컬럼비아 픽처스를 인수하여 소니 픽처스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한다. 21세기 컨텐츠 산업이 중요해진 상황에 비추어 보면 틀린 말은 아니고 오히려 시대를 앞서갔다고 할 수 도 있다. 문제는 정말 그만큼 기술 R&D를 안했다. 그러나 무리한 콘텐츠 산업의 투자는 1995년에 심각한 부채로 되돌아오게 된다. 이데이 노부유키 CEO가 창사 이래 사활을 걸고 베가(WEGA), 바이오(VAIO)등을 성공시키는 했지만 디지털 산업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는 이루어지지 않아 소니의 봄은 짧았고, 결국 이러한 영향은 계속되어 2003년 소니 쇼크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소니 쇼크 사태 이후 소니가 과거 전성기 때의 혁신적인 모습과 창의성을 거의 보여주지 못하게 되자 자연스레 전자 산업분야에서의 브랜드 가치도 하락하게 되었다.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 , 비디오 게임 사업을 펼치고 있는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와 온라인 게임으로 사업을 펼치는 소니 온라인 엔터테인먼트(2014년 매각)와 음반사업을 담당하는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 영화사업을 담당하는 소니 픽쳐스 엔터테인먼트가 전부 소니의 자회사다. 참고로 소니 뮤직과 소니 픽처스 엔터테인먼트는 인수와 합병으로 만들어졌다.그 결과 적지 않은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등에선 제작 스폰서 소개에서 상기 기재된 미디어·콘텐츠 관련 소니 계열사의 이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등, 실제로도 일본의 각종 영상물에 열심히 제작투자/유통하고 있기도 하다. 애니쪽은 애니맥스가 유명하다. 외국 드라마나 영화에도 나름대로 투자하고 있으며, 가장 유명한 사례로 마블 캐릭터의 스파이더맨 영화화 판권은 컬럼비아 픽쳐스의 주인인 소니에 있다. 특히 소니 뮤직의 경우 콜롬비아 레코드 등 미국의 뛰어난 레이블들을 공룡처럼 집어먹었기 때문에 마이클 잭슨엘비스 프레슬리브리트니 스피어스비욘세조지 윈스턴휘트니 휴스턴밥 딜런셀린 디옹산타나조지 마이클수잔 보일 등이 소속되어 있거나, 음원 유통 저작권을 갖고 있다. 이 정도 설명하면 나름대로 소니가 미디어/콘텐츠 분야에서 나름대로 성공적인 성과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전체 경영 실적으로 볼 땐 실제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고 보긴 어려울 듯 싶다. 해외 콘텐츠에도 많이 투자 했지만 그래도 엄연히 소니의 주요 투자대상은 어쨌든 일본 미디어/콘텐츠 상품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실제로 일본 국내 컨텐츠에 대한 유통 지배력을 높이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문제는 일본문화의 유행 자체가 전반적으로 크게 퇴보해버렸다. 저패니메이션은 오타쿠의 전유물로 전락하면서 심하게 고립화되어 전체적인 시장규모도 작아졌고, 해외에서의 저패니메이션의 영향력도 자국 내와 마찬가지인 상황이라 해외진출도 생각보다 신통치 않았다. 소니의 대표적인 해외 콘텐츠 사업인 소니가 1989년 인수한 컬럼비아 영화사도 처음에는 헐리우드 시장에서의 무경험으로 인하여 90년대까지는 실패를 많이 했지만지속적인 노력과 2000년대 들어서 맨 인 블랙시리즈와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대흥행으로 헐리우드 메이저 영화사의 하나로 안착하는데 성공한다. 2014 SBS에서 한 조사에 따르면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는 소니를 전자회사가 아닌 엔터테인먼트나 미디어 회사로 인식한다고 한다. 미디어에 열심히 투자한 만큼 제조업 분야에서는 비교적 소홀해져 삼성과 LG에게 생각보다 정말 빠르게 추월당했다. 소니는 아무래도 '세계 제일의 제품이라는 명성'만 꽉 잡고 있으면 세계시장에서 쉽게 물건이 팔려 나갈거라 생각했겠지만, 삼성과 LG의 능동적인 현지마케팅에 빠르게 제3세계 시장들을 뺏겨버렸다.

 

2) 시대를 잘못된 방법으로 앞서나간 소니

1995년 이데이 CEO가 취임할 당시 소니는 아날로그 시대의 최고의 전자 업체였다. 여전히 소니의 트리니트론과 워크맨은 세계 시장을 제패했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고 있었다. 따라서 이데이 CEO는 다가오는 시대에 디지털 기술이 가전과 오락 산업을 지배할 것이라 생각했다. 19952000여명 소니의 간부들이 모인 앞에서 이데이 CEO"디지털 드림 키즈" 전략을 발표한다. 디지털 드림 키즈는 디지털 시대에서 자라고 디지털 기술에 친숙한 신세대를 뜻하며 그들의 꿈을 만족시킬 독창적이고 재치있는 상품을 만들어 나가자고 이데이 CEO는 주장했다. 이데이 CEO3단계 전략을 통해 디지털 드림 키즈를 구체화했는데 바로 1단계 "Connect", 2단계 "Synergy", 3단계 "Hub"였다 1단계 Connect는 콘텐츠, 유통, 기기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소비자들을 쉽고 편리하게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다는 것이 목표였다. 따라서 1995년 이데이 CEO는 소니의 영화산업과 음반산업의 방대한 콘텐츠를 디지털로 변환시켜 인터넷과 케이블 tv로 연결하였고 별도의 인터넷 접속회사인 소네트도 설립하였다. 또한 위성 TV인 스카이 퍼펙트 서비스도 실시하고 애플 아이튠즈 스토어보다 먼저 프레스 플레이라는 온라인 음악 상점도 개설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소니 온라인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여  에버퀘스트등을 개발하고 온라인으로 다운받을수 있도록 했다.

1996년 이데이 CEO1단계 계획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자 디지털 콘텐츠를 더욱 원할하게 연결하는데 컴퓨터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여 VAIO 브랜드로 유명한 컴퓨터 사업을 시작하였고 i.LINK를 개발하여 제품을 더욱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2단계와 3단계 계획도 준비했는데, 2단계 Synergy 계획은 소니의 제품이 서로 연결되면 소비자가 소니의 제품을 사게 되니 자연스럽게 다른 소니의 제품들을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계획이고 3단계 Hub 계획은 전세계 각 가정을 소니 제품으로 하나의 디지털 허브로 만드는 계획이다. 여기까지 계획이 순조롭게만 진행된다면 이데이 CEOTV, 각종 전자기기, 컴퓨터 등을 소니의 콘텐츠와 연결하여 하나의 홈네트워크가 되어 다양한 수익 모델이 창출될 것으로 보았고, 이렇게 소니 왕국이 건설되면 다가오는 디지털 시대를 제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 계획은 1단계에서 끝나게 되는데, 이데이 CEO는 소니 제품을 서로 연결하면 소비자들이 인기있는 소니의 제품을 구매하였을 때 자연스럽게 판매가 취약한 제품의 점유율도 끌어올릴 것으로 생각했으나 결과는 이와 달랐다. 소니는 제품들을 서로 연결할때 하나의 소니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하여 독자적인 포맷을 고집하였다. 예를 들어 소니 TV는 소니의 멀티미디어 기기만 연결할 수 있었고 소니 멀티미디어기기는 소니 제품끼리만 연결될 수 있었다. 독자적인 포맷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소니의 콘텐츠를 이용하려면 소니의 제품을 사야만 했다. 당시 소니는 기술적으로 일등 기업이었고 제품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소니는 혁신적이었던 제품과 다양한 콘텐츠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소니의 둘레 안에서 소비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폐쇄적인 소니의 태도는 전자시장에서 소니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소비자들은 소니 제품을 외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미래 기술 변화를 예측하는것이 거의 불가능한데도 이데이 CEO는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계획을 세워가면서 미리 대비하려고 했고 너무 미래를 앞서 나가서 오히려 다가오는 기술 흐름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것이 소니가 디지털 시대의 전자산업에서 실패한 중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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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의 수익모델 사례

-애플은 스마트폰을 처음 개발한 회사는 아니다. 그러나 디자인 , 손쉬운 사용법 , 수많은 흥미로운 앱을 통해 혁신에 민감한 고객들을 많이 유치했다. 다수의 고객 확보능력을 바탕으로 애플은 통신사에게 많은 보조금을 받고 계약을 맺음으로서 큰 수익을 올렸다. 애플은 비용 또한 획기적으로 줄였다. 첫째로 제조원가를 줄이기 위해 값싼 중국 공장에 생산을 맡겼다. 둘째로 , 단일 모델을 출시함으로서 연구개발비를 최소화 시켰다. 셋째로 애플이라는 브랜드가 가지는 영향력과 충성고객들 때문에 다른 회사보다 광고를 많이 할 필요가 없었다. 신제품 설명회를 열면 알아서 기자들이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써줬다.

 

구글의 창업 이야기

-구글은 인터넷에 존재하는 무한한 정보를 체계화하여 사용자들에게 유용한 가치를 제공하고자하는 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창업한 회사다. 창업초기에 컴퓨터,서버에 큰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회사를 매각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결국 직접 창업을 했다. 돈벌이에 연연하지 않고 젊은이들의 창업을 돕는 엔젤투자자들에게 10만 달러를 투자받는다. 이후 구글의 기술력과 잠재수요를 바탕으로 창업투자회사에게 2500만달러의 투자를 받게 된다.

구글의 성공요소는 첫째로, 다른 포털사이트와 확연히 다른 시각을 가졌던 점이다. 고객을 오래 붙들어 놓는 것이 목적인 포털사이트와 달리 고객이 원하는 정보를 신속하게 찾고 나가게 하는 것이 구글의 목적 이였다. 이에 따라 구글은 탁월한 검색기술을 만들기 위해서 이공계의 엘리트 인재를 뽑고 그들에게 자율을 부여하고 창의성을 얻어냈다.

구글의 두 번째 성공요소는 에드워즈의 개발이다. 애드워즈란 사용자가 검색한 항목에 관련된 광고를 띄워주는는 것이다. 클릭수에 따라 광고비를 받는데, 가격도 1센트로 저렴했다. 수많은 소액 광고주들을 모집함으로서 광고주들의 저변확대로 이어지고 이것이 고객확대로 이어졌다. 또한 배너광고와 다르게 광고주와의 이해관계에서도 자유로워짐으로서 구글의 철학을 지킬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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